맨위로가기

박용성 (야구 선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용성은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로, 동아대학교 시절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하여 1980년 도쿄 세계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83년 17홈런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성적이 하락, 1988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회사원으로 근무하며, 현재 오영플라스틱 상무로 재직 중이다. 프로 통산 7시즌 동안 타율 0.258을 기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산상업고등학교 동문 - 김정현 (야구 선수)
    김정현은 마산상업고등학교와 경성대학교를 졸업한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출신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통산 기록은 없다.
  • 마산상업고등학교 동문 - 이영욱 (1932년)
    이영욱(1932년)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검사, 법무부 차관,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으며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 1984년 야구 - 최동원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 프로 야구 투수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을 이끌었고, '무쇠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선동열과 함께 한국 프로 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투수였으나 선수협 파동 이후 은퇴, 지도자 및 해설가로 활동하다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 1984년 야구 - 유두열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외야수 유두열은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으로 팀 우승과 MVP를 달성했으며, 코치로도 활동하다 2016년 신장암으로 별세했다.
  • 동아대학교 동문 - 우명규
    우명규는 대한민국의 공무원, 토목공학자이며, 서울특별시 지하철 건설본부장과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했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사퇴한 이원종의 후임으로 제28대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으나 11일 만에 사퇴했다.
  • 동아대학교 동문 - 송재호
    송재호는 1959년 데뷔하여 60년 이상 활동한 대한민국의 배우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며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고, 특히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아버지 역할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으며, 연기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다수의 연기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박용성 (야구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박용성
원어명Park Yong-Seong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경상남도 마산시
생년월일1958년 9월 30일
신장175cm
체중60kg
수비 위치외야수
투구
타석
프로 입단 연도1982년
드래프트 순위원년멤버
첫 출장KBO / 1982년
구장명 대 상대 팀전
획득 타이틀1982년 후기리그 홈런왕 (비공식 기록)
경력
선수 경력한일은행 (1981년)
롯데 자이언츠 (1982년 ~ 1988년)

2. 대학 시절

박용성은 동아대학교 2학년 때까지 투수였다. 그러나 60kg의 작은 체구 때문에 어깨와 손목에 무리가 갔고, 투수로서 생명이 다할 때쯤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여 주전 외야수로 기용되었다. 출전 기회가 많아지면서 진가가 서서히 발휘되었고, 1979년에는 한·미 대학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대학 선발로, 다음 해인 1980년에는 도쿄 세계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1] 최동원, 이만수, 김용남, 박종훈과 함께[1] 준우승을 차지하며 병역 혜택을 받았다.

3. 프로 야구 시절

박용성은 1982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동계 훈련 중 조용철(당시 경남고 투수)의 공에 왼쪽 손목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부상 회복 후 후기 리그에서 11홈런을 기록하며 '후기 리그 홈런왕'(비공식)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주목받았다.[2]

1983년에는 97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7, 17홈런, 63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8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부상으로 인해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다. 1986년에는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자유계약선수로 풀렸다.[3] 1987년 롯데와 재계약했으나,[4] 1988년 다시 자유계약선수로 방출되며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야구만 해오던 박용성은 코치 연수를 하려 했지만 비자 발급 기간이 오래 걸려서 그 기간 동안 창원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현재 그는 오영플라스틱의 상무이다.

5. 출신 학교

6. 통산 기록

년도소속타율경기수타수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도루실패4사구삼진병살타희생타장타율비고
1982롯데0.287521714961113824022128760.526후기리그 홈런왕 (비공식)
1983롯데0.28797349100191176340674160870.493
1984롯데0.22271158352072113131930620.367
1985롯데0.24574159395282124412026550.453
1986롯데0.19453721420016101112320.222
1987롯데0.0009100000010001000.000
1988롯데0.333331000100001000.333
통산7시즌0.25835992223834443145108121311215829220.444

[1]

참조

[1] 뉴스 운동선수 병역 혜택도 줄 잘 서야? 1980년대에 병역 특례 혜택 받은 야구 선수들 https://sports.news.[...] 스포티비뉴스 2018-06-14
[2] 뉴스 朴(박)용성 자유계약公示(공시)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6-12-20
[3] 뉴스 "年俸(연봉)없어도 좋다 1년만 더뛰게 해달라"눈물의 호소도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7-02-03
[4] 뉴스 원년 롯데 박용성 '나는 아직 부산갈매기다' https://news.nave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